5·17 비상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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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비상계엄은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확대된 비상계엄 조치이다.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주도하였으며, 정당 활동 금지, 국회 폐쇄, 언론 사전 검열, 대학 휴교, 파업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한다. 이 조치는 헌법상 국회 통보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적 조치로 평가되며, 약 2,699명의 학생·정치인·재야 인사가 구금되었다. 5·17 비상계엄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고, 1995년 제정된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법률에서 '5·17 내란'으로 규정되었다.
개요
5·17 비상계엄은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전국으로 확대한 비상계엄 조치이다.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이 주도하였으며,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군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정권 장악을 위해 단행되었다. 이 조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며, 이후 제5공화국 수립의 기반이 되었다.
배경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군권을 장악하였다.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생존권 투쟁이 확산되자,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비상계엄 확대를 준비하였다. 5월 10일경 전두환은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로부터 비상계엄 확대 등이 포함된 시국 수습안을 보고받고 주요 인사 검거를 지시하였다.
조치 내용
1980년 5월 17일 오전 11시, 전두환은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전군 지휘관회의를 열도록 하였다. 회의에서 제주도까지 계엄을 확대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전두환,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3명은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계엄 확대를 결재하도록 요구하였다. 밤 9시 30분,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계엄 확대안이 8분 만에 결재되었다.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이 전국계엄으로 확대되었고, 계엄포고령 제10호가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든 정치활동 중지 및 옥내외 집회·시위 금지
-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 각 대학 휴교령
- 직장 이탈 및 태업·파업 금지
-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 국보위 설치
또한 5월 18일에는 김대중, 김상현, 김종필, 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을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하는 등 정치적 탄압이 시작되었다.
영향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전남대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로 시작된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기간 동안 제5공화국 정권을 창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인권 유린과 헌정 파괴 행위가 자행되었다. 1995년 문민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5·17 비상계엄을 '5·17 내란'으로 규정하고 공소시효를 정지하였다.
법적 평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 통보 절차를 밟지 않은 채 계엄군을 동원하여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가운데 취해진 불법적 조치로 평가된다. 1995년 제정된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법률'은 이 조치를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행위'로 규정하였다. 1997년 12·12 및 5·18 사건 재판에서는 '5·18 내란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관련 사건
5·17 비상계엄은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으로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하였다. '서울의 봄'은 10·26 사태부터 5·17 비상계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